메타버스 NFT 세상이 되면서 저작권과 상표권, 디자인권에 대한 우려 섞인 목소리들이 나온다. 누가 누구의 것을 표절한 것인지, 독창적인 작품인데 우연히(?) 유사한 것인지 등에 대해 갑론을박도 있다. 관련 법체계가 정비되는 사이, 미리 대비한다는 차원에서 알아보도록 하자. 메타버스 NFT 거래가 아트워크 예술작품 위주로 이뤄지는 현재 상황에 비춰, 몽유도원도와 도화원기 사례로 공부해보자.
몽유도원도와 도화원기에 대해 이야기하기 전에 당시 명나라와 조선의 사이에 대해 알아두도록 하자. 역사적 연관성이 두 작품의 연관성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된다.
우선, 도연명과 안평대군과의 나이 차이보다는 조선과 교류하던 명나라와 조선의 관게에 대해 생각해봐야 한다. 당시 조선의 사대부들은 명나라의 것을 받아들이고 배우는데 주저하지 않았다. 안평대군이 즐겨 보고 감상하던 작품들도 명나라에서 건너온 그림이나 글씨, 글들이 많았음이 물론이다.
그리고 명나라는 1368년부터 1644년까지 지속된 나라인데, 몽고족이 세운 원(元)나라를 멸망시키고 주원장(朱元璋)이 세운 나라다. 명나라의 수도는 그 당시 지명이 ‘응천부(應天府)’라고 하는데 지금의 난징(南京)이다.
그런데 조선과 명나라 사이에서 눈여겨 볼 이야기는 ‘주체(朱棣)’라고 불리던 명나라의 영락제(永樂帝)인데, 명나라를 세운 주원장(홍무제:洪武帝)의 26명의 아들들 중에 넷째 아들에 대해서다.
북경(北京)을 맡아서 다스리다가 1402년에 ‘주윤웬’이란 자기의 조카가 황제의 자리에 오르자 이를 찬탈해서 자기가 황제가 된 사람이다.
1402년부터 1424년까지 중국을 다스렸고 중국의 3대 황제가 된 건데 1대는 홍무제라고 부르는 주원장이었고, 2대는 건문제(建文帝)라고 부르는 ‘주윤문(朱允炆)’, 이후에 건문제가 왕권 강화의 목적으로 지방을 나눠 다스리던 자신의 형제들을 공격한 일이 벌어지면서 연왕(燕王)으로 불리던 주체(朱棣)가 오히려 역공을 해서 황제가 된 역사가 있다.
“그걸 정란(靖難)의 변이라고 부르는데, 영락제는 1421년에 명나라의 수도를 난징(南京)에서 베이징(北京)으로 옮기게 되었지.”
명나라의 역사에 대해 눈여겨 볼 부분이라고 말한 이유는 조선의 계유정란이 1453년에 생겼기 때문이다. 중국의 정란의 변은 1399년에 시작되어 1402년에 끝났는데 수양대군이 1417년생이니까 1453년엔 36살이었다는 사실이다, 명나라의 정란의 변은 1399년에 생겨서 1402년에 끝났긴 하지만 영락제가 즉위한 기간이 1424년까지 했으니까 수양대군이 어쩌면 영락제가 어떻게 중국의 황제가 되었는지도 알았다는 추론이 가능하지 않은가?
“수양대군은 어떤 생각을 했을까?”
명나라에서는 ‘영락제’에 이어 1424년부터 1425년까지 1년간 황제가 되었던 홍희제(洪熙帝), ‘홍희제’의 뒤를 이어 1425년부터 1435년까지 통치한 선덕제(宣德帝), 그리고 ‘선덕제’의 뒤를 이어 1435부터 1449년까지 통치한 명나라 제6대 황제인 정통제(正統帝)가 있고, 이를 이어 명나라의 제7대 황제에 오른 경태제(景太帝)가 1449년부터 1457년까지 다스린 시기였다.
명나라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던 당시 조선의 왕실에서는 어떤 생각을 하게 되었을까? 마침 당시 조선에서는 병약해진 세종대왕의 뒤를 놓고 문종과 단종, 수양대군과 안평대군 등이 후사를 논하던 시기 아니었을까?
“수양대군은 명나라의 당시 상황을 보면서 조선의 사정을 빗대어 뭔가 알아차렸을 수도 있어. 아프기 만한 문종의 모습을 보고, 나이 어린 단종이 왕위에 오르는 걸 보면서 뭔가 당시 명나라의 왕위 계승 과정이랑 닮았다고 눈치를 챘을 수도 있었지. 계유정란이 생기게 된 이유 아니었을까? 수양대군은 왕위에 관심이 많았으니 명나라의 왕위 계승을 눈여겨봤다고 하고, 안평대군은? 시와 그림이 관심이 많았으니 명나라를 오가는 사람을 통해 도화원기를 보게 된 당연한 거야. 당시 도화서에서 일하던 안견도 마찬가지지. 몽유도원도는 안견이 안평대군의 꿈을 듣고 3일 만에 그린 그림이 아니라 안견이 도화원기를 읽고 상상하다가 미리 그려둔 그림일 수 있다는 이야기야. 당시 조선의 상황이 권력을 서로 차지하려는 극심한 세력 다툼이 벌어지는 상황이었을 텐데 권력다툼을 부질없는 것으로 여기고 현실에서 벗어나고자 한 안견과 안평대군이었다면?”

사진| 안견기념관
안견과 안평대군에게 현실을 벗어나 상상 속 이상향의 꿈을 심어준 사람은 누구인가?
도연명(陶淵明, 365~427)은 중국의 남조(南朝)에서 송(宋)나라 초기에 활동한 시인이다. 한때 관직에 올라 벼슬 생활을 하였지만 41세가 되던 해에 누이동생의 죽음을 이유로 사퇴하고 전원생활로 돌아가 63세를 일기로 생애를 마감하였다.
도연명의 도화원기(桃花源記)는 무릉의 어부가 복숭아꽃이 핀 물길을 따라 올라가 숲속으로 들어갔다가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곳에서 대접을 받고 돌아온다는 내용인데, 드넓은 중국 땅 어딘가에 분명 있을 법한 장소를 이야기한다는 점이 특징이다.
“몽유도원도는 도화원기 속에 담겨진 이야기 속 장소이기도 하지만 명나라 송욱(宋旭)이 그린 도화원도(桃花源圖)에 나오는 장소이기도 하지. 배를 타고 가다가 복숭아밭에 내려서 신비한 비밀의 장소를 찾아가는 과정을 그대로 그려냈거든. 몽유도원도랑 상당히 유사한 구석 방식 아니겠어? 그뿐인가? 청(淸)나라 고부진(顧符稹)의 도원도(桃源圖)에서도 복숭아밭이 나오는데, 몽유도원이란 말은 꿈속에서 복숭아꽃이 핀 샘을 찾아가는 과정을 말하는데, 이걸 그리면 몽유도원도란 제목과 일치하게 되는 셈이야.”
충남 서산 지곡면에 소재한 안견기념관에는 몽유도원도 영인본이 소장되어 있는데 이곳에 가면 몽유도원도에 첨부된 안평대군의 찬시를 볼 수 있다. 그 내용을 소개하자면 아래와 같다.
도화원기 속 이야기와 비교하면서 보자.

사진| 몽유도원도 영인본, 안견기념관
정묘년 4월 20일 밤.
내가 바야흐로 잠들려 할 즈음, 정신이 아련해지며 잠에 깊게 빠져들어 꿈에 이르렀다.
홀연히 인수(仁叟:박팽년)와 함께 어느 산 아래 이르렀는데, 산이 첩첩이 겹쳐 있고 골짜기가 깊어 산세가 험준하고 매우 넓은 모양이었다. 복숭아나무가 수십 그루 있고, 그 사이로 오솔길이 나 있고 숲 가장자리에 갈림길이 있었다.
어느 곳으로 가야 옳은지를 몰라 마음을 정하지 못하고 머뭇거리는데 우연히 산관야복(山冠野服)차림의 한 사람을 만났다. 예를 차리어 인사를 하며 내게 말하길, “이 길을 따라 북쪽으로 골짜기에 들어서면 곧 도원입니다.”라고 했다.
나와 인수가 말을 채찍질하여 그곳을 찾으니 절벽은 깎아지른 듯 우뚝 섰고, 초록이 우거진 곳은 무성하고 울창하며, 계곡물은 굽이쳐 흘러 백 번이나 꺾이어 어느 길로 가야할지 혼미하였다.
그 골짜기에 들어서니 동천(洞天:골짜기에서 바라보는 하늘, 필자 주)이 넓고 확 트여 2, 3리 되어 보였다. 사방에 산과 깎은 듯한 낭떠러지가 우뚝 서 있고, 운무(雲霧)가 자욱이 서려있고, 멀고 가까운 곳 복숭아나무 숲에는 햇볕이 비춰 노을이 일고 있었다.
또 대나무 숲속에 있는 초가집은 사립문이 반쯤 열려 있고, 흙섬돌은 이미 부서졌고, 닭과 개, 소, 말은 없었다. 동네 앞 시내에는 오직 작은 배 한 척이 떠 있어 물결 따라 왔다 갔다 하니 쓸쓸한 정경이 마치 선부(仙府)와 같았다.
이에 머뭇거리며 오래도록 그것을 쳐다보며 인수에게 말하길, “암벽에 시렁을 걸고 골짜기를 뚫어 가옥을 짓는다 하는 것이 어찌 이것이 아니겠는가! 실로 도원동(桃源洞)이로구나.”하였다.
옆에 여러 사람이 뒤를 따르고 있었는데 정부(貞父:최항), 범옹(泛翁:신숙주) 등이 함께 운(韻)에 맞춰 시를 지었다. 서로 신발을 정제(整齊:가지런히 놓다, 필자 주)하고 오르내리며 좌우 주위를 둘러보고 마음이 가는대로 유유히 즐기다 홀연히 꿈에서 깨어났다.
아아, 큰 도회 큰 고을은 실로 번화하여 고위 벼슬아치들이 노니는 곳이요, 깎아지른 듯한 낭떠러지 깊은 산골은 조용히 숨어사는 은자(隱者)가 거처하는 곳이다. 이러한 까닭으로 푸르고 자줏빛 의복을 몸에 걸친 공경(公卿:벼슬아치, 관료, 필자 주)들의 발자국이 산림에 이르지 못하고, 자연 속에 성정(性情)을 도야하는 자는 꿈에도 조정을 생각하지 않는다. 대개 고요함과 시끄러움은 길이 다르니 이의 이치는 필연적이다.
옛 사람이 말하길, “대낮에 행하는 바를 밤에 꿈꾼다.”라고 했다.
내가 궁중에 몸을 기탁하여 조석(朝夕)으로 일을 하는데 어찌 산림에 이르는 꿈을 꾸었단 말인가? 또 어찌 도원에 이를 수 있었던 말인가? 내가 서로 좋아하는 사람이 많거늘 하필이면 이 몇 사람만이 나를 따라 도원에서 노닐었단 말인가? 생각건대 성향이 그윽하고 궁벽한 것을 좋아하며 본디 산수의 정치를 좋아하는 마음이 있고, 또한 이들 몇 사람과 교분이 특별히 두터운 까닭으로 이에 이르게 된 것일 게다.
이에 가도(可度)로 하여금 그림을 그리게 하였다. 단지 예부터 도원이라고 일컬어지는 것인지 알지 못하나 또한 이와 같지 않겠는가? 훗날 이 그림을 보는 자가 옛 그림을 구하여 나의 꿈과 비교한다면 반드시 무슨 말이 있을 것이다.
꿈을 꾸고 사흘 뒤 그림이 이미 완성되었기에 비해당(匪解堂)의 매죽헌(梅竹軒)에서 이 글을 쓴다.
그런데 복숭아밭과 신선이 살아가는 장소로 이상향의 낙원을 그린 그림과 싯구들은 도화원기나 도화원도뿐만이 아니었다. 당나라 시절 시인 왕유(王維, 700-761)가 그린 도원행(桃源行)도 있고, 조선 후기의 문인이자 화가인 이하곤(李夏坤, 1677∼1724) <도원문진도(桃園問津圖)>도 있다.
이처럼 특정한 시대엔 그림이나 글 등의 예술에서 유행하는 흐름이 있기 마련인데 시대적으로 혼란한 정국에서는 이상향을 그리고, 안정된 정세에서는 인간 본연의 내적 성숙을 다루는 작품들이 많은 게 사실이다.
어쩌면, 몽유도원도는 당대에 명성이 자자한 명작을 흠모한 안견이 모사를 해오던 중, 안평대군의 꿈을 듣고 안경 스타일대로 새롭게 창작해낸 걸작이었을지 모른다.
“이런 이야기를 하면 어떤 사람들은 조선인이 명나라의 것을 표절할 이유는 없다고 거부감을 가질지도 몰라. 하지만 그게 역사적 자부심이라면 좋을 텐데 실상을 알고 보면 없었다고 말하기도 어렵지. 허난설헌(許蘭雪軒, 1563년~1589년 3월 19일)은 홍길동전을 지은 허균의 누이인데, 조선 중반을 대표하는 여류 시인이자 작가, 화가로이기도 하거든. 허난설헌은 자신이 죽을 때 자기가 지은 글들을 다 불에 태워 없애달라고 해서 대부분 사라지긴 했는데 허균이 누이의 작품을 되살려 내면서 현재에는 200여 작품이 전해지거든. 그런데 그 이후인가? 명나라에 ‘난설헌집’이 출간되고 1711년에는 일본에서도 허난설헌 작품들이 출간되면서 글로벌한 여류 시인으로 유명해졌는데, 허난설헌 글들 중에 표절이 많다는 얘기가 돈 것도 사실이거든. 당대에 한국의 학자들부터 시작해서 명나라와 청나라에서도 허난설헌의 작품에 표절작이 많다는 걸 지적하고 나섰어. 가장 최근엔 허난설헌의 표절작에 대해 논문까지 나온 일이 있을 거야.”
메타버스 NFT 저작권 및 특허권에 대한 더 많은 이야기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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